1. 서론: 사우디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 파터널리즘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단순히 “석유 부국”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사우디를 움직여온 실질적 원리는 파터널리즘(Paternalism)이다.
여기서 말하는 파터널리즘은, 국가가 ‘아버지’처럼 국민을 돌봐주고, 국민은 그에 대한 대가로 충성심을 제공하는 구조적 통치 방식을 뜻한다. 서구 복지국가의 제도화된 복지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사우디에서는 정치적 정당성, 경제정책의 방향, 사회 전체의 기대치까지 모두 이 파터널리즘 구조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즉 정치적인 방향은 왕가가 주도할테니 국민들은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우디 국민은 수십 년 동안 국가로부터 거의 무료에 가까운 각종 혜택을 제공 받았고, 이는 국가와 국민 사이의 일종의 사회적 계약이었다.
- 국가는 국민에게 경제적 걱정을 덜어주는 혜택을 준다.
- 국민은 정치적 발언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 충성의 대가로 국가가 계속해서 생계를 보장한다.
이 체제는 사우디 왕정의 안정성을 유지한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그리고 시대가 변한 지금도 여전히 사우디 국민의 사고방식과 기대치를 규정하고 있다.
이 파트에서는 파터널리즘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유지되었으며, 어떤 구조적 한계를 낳았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2. 파터널리즘의 기원: 부족 사회의 정치와 국가 형성
사우디는 건국 이전까지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다.
사막에 흩어져 살아가는 부족(Tribe) 중심의 사회였으며, 서구에서 말하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 개념과는 다른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아랍권에선 이러한 정치체계속에서 국가를 건설하였으며, 2차대전 이후 중동의 많은 나라들이 이를 바탕으로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 통치 방식의 핵심 원리가 “가부장적 권위”였다.
1. 부족 사회에서의 ‘아버지 권위’ 모델
부족사회에서 지도자는 ‘가장’(Patriarch)과 같은 역할을 한다.
지도자는 구성원에게 자원을 나누어주고 보호하며, 구성원은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구조를 갖는다.
척박한 환경에선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며, 이는 개방 되어있는 지형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흔한 구조였다. 튀르크, 몽골 또한 이와 비슷한 형태로 부족 사회를 유지하였고, 국가를 건설 한 후에도 이런 형태는 유지가 되어왔다. 유목민족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우디 왕가는 이 전통을 그대로 국가 통치 체제로 확대하였다.
즉,
부족의 가장 → 국가의 아버지 → 왕가 전체가 국민의 보호자
라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2.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 된 파터널리즘
사우디에는 선거도, 정당도, 정치적 경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왕정이 유지되는 이유는 왕가가 파터널리즘을 기반으로 한 부성적 정당성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왕가는 국민의 생계를 책임지고, 국민은 그 대가로 정치적 침묵과 충성으로 응답한다.
이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구조적 관계로 발전하였다.
3. 석유 발견과 파터널리즘의 폭발적 확장
1938년, 사우디 동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이 국가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석유는 파터널리즘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경제적 엔진이었다.
1. 세금 없는 국가, 혜택만 받는 국민
사우디 국민은 세금을 거의 내지 않는다.
국가 재정의 대부분은 석유 수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세금이 없다는 것은 국민이 국가에 요구할 정치적 권리도 적다는 뜻이다.
이것은 왕정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2. 국민에게 제공되는 막대한 혜택들
사우디 정부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국민에게 부를 분배했다.
- 공공부문 고임금 일자리 제공
- 주택 지원금
- 결혼·출산 보조금
- 물·전기 등 공공요금 보조
- 대학 등록금 무료
- 해외 유학 장학금
- 무상 의료
- 유류 보조금
- 식량 가격 통제
이러한 정책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왕가의 은혜와 보호의 증표였다.
파터널리즘은 이 시기에 사실상 절정을 맞이했다.
3. 국민의 기대치 고착화
국민은 복지를 “권리”가 아닌 “왕가의 은혜”로 인식하면서도, 실제 생활은 복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다. 한 세대가 아니라 두 세대 이상이 이런 시스템에 적응하면서, 사우디 국민은 사실상 근로의욕을 잃어갔다. 이것은 산업 전환을 막는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나는 사실상 여기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한 가장 큰 의구심을 갖는다. 모든 것은 해주는 왕가 밑에서 과연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길까?
4. 파터널리즘의 부작용: 산업 부재와 노동시장 왜곡
사우디의 파터널리즘은 안정성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심각한 부작용도 낳았다.
1. 공공부문 과잉 의존
사우디 국민의 60~70%는 공공부문에서 일한다.
공공부문 급여는 민간기업보다 훨씬 높고, 업무 강도는 낮은 경우가 많다.
특히나 공공기업에서의 고용은 석유와 관련되어있는 경우가 많고, 이는 혁신보다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데 초점이 두어있다.
민간 기업은 사우디 국민을 채용하기 어렵고, 대신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다.
이 구조가 수십 년간 유지되면서
사우디 국민 = 공공부문 일자리라는 공식이 굳어졌다.
2. 민간 부문 경쟁력 부족
사우디 경제는 진정한 의미에서 산업 생태계가 없다.
- 제조업 기반 약함
- 기술 인력 부족
- 교육 시스템 산업 연계 미흡
- 연구개발(R&D) 취약
- 서비스 산업 경쟁력 낮음
이는 석유 수익을 나누어주는 파터널리즘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반대로 UAE의 경우 화성탐사선(AMAL)을 발사했습니다. 이는 더이상 석유에 의존하지 않고 인적자원을 투자해 탈석유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외국인 노동자 의존 심화
사우디 건설·기술업종의 대부분을 외국인이 담당한다.
-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노동자
- 필리핀 간호·서비스 인력
- 서구 엔지니어
- 한국·중국의 전문 기술자
사우디 국민은 기대임금이 높고, 노동 의지가 낮으며, 스스로 기술 숙련을 쌓으려 하지 않는다. 현재 가지고 있는 석유라는 자원을 토대로 정책을 만들고 유지했던 것은 나라의 존속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4. 석유 수익의 ‘단일 자원 의존성’
파터널리즘은 석유 수익이 유지되는 동안만 지속 가능하다.
경제가 다변화되지 않는 한 사우디는 석유 가격에 취약하다.
5. 저유가 시대의 등장: 파터널리즘 붕괴의 시작
2014년 이후 세계 유가는 장기 하락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부터 사우디의 파터널리즘 구조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 재정 악화
유가 하락 → 세입 감소 → 재정적자 확대
사우디 정부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지출을 삭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2. 복지 축소는 즉각적인 국민 불만으로 이어짐
연료 보조금을 일부 축소하자 국민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전기세 인상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파터널리즘 체제의 심리적 기초, 즉 “국가는 우리에게 무한히 제공해야 한다”는 인식은
이미 국민에게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3. 왕가의 재정 부담 심화
국가 재정은 대규모 인프라 사업, 공무원 급여, 보조금 지출로 압박받았다.
경제학자들은 이 시기부터 “사우디 파터널리즘은 지속 불가능하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4. 새로운 해법의 필요성 대두
사우디는 단순한 긴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국가의 경제 구조 전반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빈살만(MBS)**과 그의 비전 2030이다.